작가소개

김용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뛰어난 예술가요 인문학자로, 유화에서 동양화로, 회화에서 미술사로, 남에서 북으로, 그리고 미술평론가·수필가·장정가·교육자로 우리 근현대 문화예술사를 수놓았다.
경북 선산(善山) 출신으로 유아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세 살 때 개울에서 본 송사리를 그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자의적 선택을 한 이후 다채로운 삶으로 20세기 중반을 관통한 그는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산문은 김용준’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고, 화가로서 외에도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는 등 미술사학자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리석호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문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후소회(後素會)와 《서화미술협회전람회》 및 《조선미술전람회》를 무대로 활동했던 화가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이석호는 일본화풍의 배격과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지향을 내세웠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의 결성에 참여하는가 하면, 좌익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6년 북쪽의 강원도 해방탑 건설준비위원회에 초청을 받아 이쾌대(李快大, 1913~1965) · 조규봉(曺圭奉, 1917~1997) · 김정수(金丁秀, 1917~1997)와 함께 올라갔으나 이쾌대와 함께 다시 서울로 내려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물질문화유물보존위원회의 유물북송(北送)을 돕다가 조선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월북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으로 1963년까지 활동하였다.이석호는 평양미술대학 교수였던 김용준의 미학이 북한 미술계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주목받은 인물이다. 

정종여

일제시기와 해방기를 거쳐 분단시기에 활동한 월북 작가이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 미술학교와 이상범이 운영하는 청전화숙에서 수업기를 보낸 정종여는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三月의 雪》로 창덕궁상을 수상하는 등 동양화 2세대로서 수묵과 채색을 넘나들며 전도유망한 화가로 인정받았다.
해방 후 서양화의 유입으로 동양화가 낡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져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정종여는 조선화의 길을 개척하는데 커다란 자욱을 남긴 화가이다.
 반평생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 분과위원장을 역임한 정종여는 북한미술 본류를 형성하는 채색화 중심의 조선화를 정립한 최고의 대가로 추앙받으며 호방하면서도 섬세한 풍경화와 화조화 등에서 독보적이면서도 주옥같은 발자취를 남겼다. 정종여의 그림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채색과 수묵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필묵에 변화를 주는 극적인 구성이 돋보인다.